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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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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준(1926년)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자 새마을운동 지도자이다. 1950년대 동광원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았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근면, 자조, 협동의 가치를 강조하며 농촌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새마을운동을 주도했고, '농심' 사상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제시했다. 김준은 2012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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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192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준
본명김준(金準)
혜경 김준 선생님
혜경 김준 선생님
직업사회 운동가
주요 활동새마을운동
개인 정보
출생일(정보 없음)
출생지(정보 없음)
사망일(정보 없음)
사망지(정보 없음)
사망 원인(정보 없음)
발견지(정보 없음)
매장지(정보 없음)
거주지(정보 없음)
성별(정보 없음)
국적(정보 없음)
시민권(정보 없음)
본관(정보 없음)
별칭(정보 없음)
학력(정보 없음)
부모(정보 없음)
형제(정보 없음)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동거인(정보 없음)
가족(정보 없음)
친척(정보 없음)
병역(정보 없음)
활동
관련 활동(정보 없음)
활동 기간(정보 없음)
활동 이념(정보 없음)
영향을 줌(정보 없음)
영향을 받음(정보 없음)
경력(정보 없음)
상훈(정보 없음)
기타
서명(정보 없음)
웹사이트(정보 없음)
기타(정보 없음)
각주(정보 없음)

2. 생애

1926년 4월 26일 전라남도 영광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리농림학교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54년 동광원 정인세 선생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1] 1955년 교수직을 버리고 동광원에 들어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현필, 유영모 등과 교류하며 이웃 사랑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추구했다.

1960년대유달영 교수의 추천으로 재건 국민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새마을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원장과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새마을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6] 그는 동광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강조하며 실천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새마을운동의 지속을 위해 노력했으며, 1988년 새마을중앙본부 회장으로 복귀하여 운동을 다시 이끌었다[8]. 2012년 2월 13일 향년 86세로 별세했으며, 새마을 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후 2012년 2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9]

2. 1. 생애 초반

김준은 1926년 4월 26일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명섭 장로와 모친 조교촌 권사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모태 신앙을 가졌다. 이리농림학교 (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51년에는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2. 2. 동광원과 귀일원

1954년 재매교회(현 신안교회)에서 동광원 정인세 선생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1] 이후 광주 방림동 밤나무골에 있는 동광원을 드나들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 생활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살 곳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이현필,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성경과 인생에 대해 깊이 논의하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삶에 가치를 두기로 결심했다.[2] 마침내 1955년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동광원에 들어가 직접 농사를 짓고 고아들을 교육하며 1959년까지 공동체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근검절약, 협동, 자급자족의 생활 방식을 몸소 익혔다.[3]

김준은 훗날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실천 방법이 동광원의 정신과 생활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에게 피해 주거나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동광원의 정신과 삶이 내가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펼친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과 실천운동의 근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동광원과 인연을 맺은 이후에도 가족처럼 동광원과 귀일원을 꾸준히 왕래했으며, 1994년부터 2012년까지 귀일원의 이사로 활동하며 관계를 지속했다.

2. 3. 새마을운동

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신운동으로 새마을운동이 있다.[5] 김준은 서울대학교 은사인 유달영 교수의 추천으로 1960년대 초 재건 국민운동에 참여하여 경상북도 지부장을 맡았다. 이후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원장과 새마을운동중앙회 초대, 제2대, 제6대 회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새마을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6]

새마을지도자 교육훈련에서 그는 직접 행동하는 실천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의 행동 지향적인 실천에는 기독교 신앙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예수는 행(行)치 않고는 말한 일이 없는 것으로 안다. 제자의 발을 씻어 주면서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더 높다고 가르쳤다”고 말하며 설득보다는 행동, 말보다는 행위의 사실을 강조했다. 이러한 실천성은 그의 리더십에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고 새마을교육의 성과에 기여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중심에서 김준이 보여준 실천적 리더십은 농촌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 농촌 근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은 짧은 기간 동안 농촌 환경 개선 사업과 소득 증대 사업을 통해 농촌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농민들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성과는 새마을운동이 관념이나 이론이 아닌 행동과 실천에 기반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김준의 순수성과 열정은 당시 농촌 개발의 주역이었던 새마을지도자들뿐만 아니라 1970년대 농촌 사회의 변화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식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새마을지도자의 지도자’ 또는 ‘새마을운동의 교주’로 불리고 있다.[7]

2. 4. 끝나지 않은 새마을운동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3묘역에 위치한 혜경 김준 선생의 묘소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존폐 위기에 처하자, 그는 이를 정부 기구에서 민간 기구로 전환하여 새로운 시대에 적응시키려 노력했다. 1984년 2월 새마을 관련 업무에서 물러난 뒤에는 농촌 운동 관련 기고 및 강연 활동을 했다. 이후 1988년 새마을중앙본부 회장으로 복귀하여 다시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8]. 김준은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도 새마을운동은 계속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새마을운동은 마치 종교적 신념과 같았다.

2. 5. 말년

2012년 2월 13일 오후, 향년 86세를 일기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새마을 중앙회가 주관하는 새마을 장으로 거행되었으며, 2012년 2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9]

3. 농심(農心) 사상

혜경 김준 선생의 친필


김준은 “농부가 자연의 이치(理致)에 따라 흙과 더불어 생명을 가꾸어 가면서 터득한 농업의 정신”을 ‘농심(農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터득하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삼아 삶의 지혜를 배우고 삶의 계율을 찾았다고 보았다.

새마을교육이 사회지도자과정으로 확대되면서 스님, 목사, 원불교 교무 등 종교 지도자들도 연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연수를 마친 후 "새마을정신으로 소개하는 김 준 원장의 농심은 바로 우리 종교의 말씀과 같다"고 입을 모았으며, 일부는 새마을운동을 '농심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롯데 그룹의 신(辛) 회장은 김준 원장의 강의를 듣고 “롯데는 라면을 만드는 회사인데, 롯데라면에 농심을 첨가하여 공급하면 농심이 보다 빨리 파급 될 것 같은데, 라면 이름을 농심라면으로 해도 괜찮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에 김준 원장과 연수생들이 박수로 환영하여 농심 라면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다. 초기 농심라면 봉지에는 농심의 덕목(德目)이 차례로 소개되기도 했다.[11]

4. 말씀

김준은 생전에 다양한 가르침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은 농심(農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농부가 작물을 대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모든 일에 임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1] 또한 겸손하여 다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군자(君子)라고 보았다.[2]

그는 리더의 자세에 대해 총재나 회장 같은 높은 직책은 '큰 머슴', '상머슴' 등으로 불러야 한다며 겸손과 봉사의 자세를 강조했다.[3] 솔선수범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공의 열쇠이며,[8] 면장이나 시장 같은 지방자치단체장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현장을 직접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특히 농촌 살리기 운동을 예로 들며, 백 마디 말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현장에서 땀 흘리는 소수의 진정성 있는 행동이라고 역설했다.[10] 운동의 본질은 생명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며, 말로만 하는 것은 진정한 운동이 아니라고 보았다.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7] 봉사활동 역시 도움이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맞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스스로 먼저 땀 흘리며 시작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했고,[6] 뿌리가 튼튼해야 좋은 열매를 맺듯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1]

사회 현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공산당서기장 제도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언급하며,[4] 실용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그는 부정적인 요소(-1)가 아무리 많이 모여도 긍정적인 결과(1)를 만들 수 없지만, 작은 성실함(0.01)들이 모이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5] 또한 세상은 이미 변화의 준비(불쏘시개)가 되어 있어 작은 계기(성냥불)만 있다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진단했으며, 진리는 양(量)이 아닌 질(質)에 있다고 강조했다.

5. 약력

연도내용
1926년 4월 26일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 포천리 출생
1944년 12월이리농림학교 임과 졸업
1949년 7월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 졸업
1951년 6월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1959년 3월복음농민의숙 창설 및 경영
1962년 9월재건 국민운동 중앙교육원 교수
1964년 12월농협중앙회 교육원 교수
1966년 9월농협대학 교수
1972년 1월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
1979년 2월계명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 수여
1980년 3월헌법심의위원회 위원
1980년 12월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1982년 10월독립기념관 건립추진회 이사
1988년 2월민주화합추진위원회 위원
1988년 4월새마을중앙본부 회장
1991년 4월과학기술 국민이해촉진위원회 위원
1993년 12월남도학숙 원장
1996년 3월초당산업대학 총장


6. 상훈

연도훈장/상 이름비고
1976년새마을훈장 자립장
1981년태국 정부 훈장 백상장
1982년5.16 민족상 (사회부문)
1993년세계 MRA 도덕상
2012년국민훈장 무궁화장추서


참조

[1] 뉴스 김정호의 광주역사산책 5. 혐오했던 봉선동 http://www.moodeungi[...] 무등일보 2013-08-01
[2] 뉴스 “서로 섬기려 드니 평화로워요” - 여성 수도자에게 길을 묻다] 개신교-남원 동광원 김금남 원장 http://www.hani.co.k[...] 한겨레 2006-12-31
[3] 간행물 귀일원 60년사 출판대동문화재단
[4] 간행물 복흥면지 2011
[5] 서적 전환시대의 행정가 나남출판사
[6] 뉴스 [새마을운동은 살아 있다] 개발 경제의 상징…NGO로 변신 - 굴곡 많았던 38년 역사 https://news.v.daum.[...] 한경비즈니스 2008-08-29
[7] 뉴스 미래를 준비한 평신도신학자를 낳은 광주 - 빛고을 성자를 그리며 (Ⅰ) http://www.kmctimes.[...] 기독교타임즈 2004-08-05
[8] 뉴스 돌아온 일꾼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8-04-05
[9] 뉴스 [사설]새마을운동 대부 김준 전회장 타계에 부쳐 http://www.nongmin.c[...] 농민신문 2012-02-17
[10] 뉴스 “과학과 합리주의” - [오피니언 전문가스토리] 신윤표 한남대학교 12대 총장 http://www.hanbatilb[...] 한밭일보 2013-04-07
[11] 뉴스 人氣높아 공급달리는 農心라면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7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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